살다보면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든
순간들이 있다. 사업의 실패, 실연이나 사별, 소외감,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병마의 고통, 가난..기타 헤아릴 수 없는 사연들로 말미암아 누군가에게는 더이상의 삶이 무의미한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죽음을 결행하는데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한 준비를 거쳐 죽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을 저지르게 된다.
고층에서 떨어지는 것은 어떨까? 중력가속도 9.8(m/s)의 상콤한 바람을 맞으며 순식간에 낙하한 후 차디찬 콘크리이트 바닥에 떨어지고 나면 죽을 때까지 고통은 아주 순식간일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대가리는
수박처럼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뇌는 일정시간 유지되기 때문에 팔과 다리를 비롯 모든 뼈들이 분리되는
동안 느끼는 극심한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재수없으면 부러진 갈비뼈 중 하나가 심장이나 폐를 찔러 오만가지 지랄발광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어떨까? 고층에서 떨어지는 것보다야 조금 덜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질식사보다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 심장마비로 죽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빠져 죽는 곳이 강이든,
바다든 간에 당신의 시체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는 어렵다하니,
가족들에는 두번 민폐를 끼치는 일일 것이며,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채 죽을 수도 있다. 운이 좋아 며칠 지난 후 시체를 발견한다고 해도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팅팅 불어터진 채 다슬기들이 달라붙어 냠냠 파먹고 있을 것이다.
피부와 살점이 문드러져 뚝뚝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시체를 염하는 사람들도 아주 고역스러워 대부분 화장한다고 한다. (덧, 익사자 시체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돈때문에 못된 장난을 친다는 얘기도 간혹들었다)
신나를 끼얹고 분사하는 것은 어떨까? 역시 쉽지 않은
방법이다. 뼈가 녹을 때까지 불에 타다가 아주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은 복이라도 받은 셈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타고 있는 순간 의협심이 왕성한 누군가에 의해 구조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으허헝ㅎ런엄날니라ㅣㄴ라;...
목을 매다는 것은 어떨까? 가장 많이 애용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의외로 긴 시간동안 질식의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다. 통상적으로는 5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똥 오줌까지 다 지릴 정도의 고통이 엄습할 때 쯤이면, 눈에는 실핏줄이 터지고 폐부종이 생기면서 장기가 터져 피가 맺힌다고 한다. 죽은 후 뒷처리도 문제인데 목을 매단 부분 위로는 파랗게 질려있는 상태에서 20cm정도로 늘어난 긴 혓바닥을 빼물고 죽어있을 것이다. 사체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평생의 공포가 될 수도 있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종교에서는 자살을 살인보다 더 나쁜 죄악으로 규정을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특히나 불교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이다. 죽어서는 지옥의 최종단계인 무간지옥에 빠져 이승의 고통을 이어갈 것이며, 윤회해서는 사람으로 환생하지도 못하고 축생한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어본 일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자살로 죽은 자를 위해 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죽어서 천주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명복도 받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은 자신의 것만이 아닌 남아 있는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도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쉽게 생존의 싸움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저마다
독특한 달란트를 가지도록 하셨다. 반면에 극심한 공포도 주시었다. 공포의 원천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야 말로 궁극적 공포가 되는 셈이다.
인간의 내면에 은연중 존재하게 되는 이 공포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쉬이 포기하지 않도록 주신
선물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하찮은 생명조차도
본능적으로 살기위해
도망을 간다. 왜냐면 죽음이 공포스럽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쉽고 편하게 죽는 방법이 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우리네 삶은 힘들고 무겁고 고달프다. 일생을 거쳐 모종의 의무나
시험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숙명처럼 짓눌려 살아야하니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부터가 벌써 하루에도 숱하게 죽음의
유혹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직장 생활 도중에도 아유~ 저 색히를
그냥 콱 저승길 동무로 삼아 버릴까 싶은 생각이 한두번 들때가 아니다. 그러나 죽는 건
여전히 두렵다. 그 두려움이 오늘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어떤 유인이 아닐까 하는 시건방진 단정도 해본다. 죽지 못해 산다는 세간의 말들이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죽기 두렵다는 공포가 곧 살고 싶다는 의욕으로 바뀌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죽을만큼 노력해서 치열하게 살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삶이 정말 후회없는 삶이었다고 여겨진다면, 그 때는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신(神)만이 아실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