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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사건 이후,43주년을 앞두고
말보르 골드등록일2012.05.21 11:15:02조회2,017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







<분신자살을 하는 전태일 열사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출처>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사건의 시대적 배경




전태일이 평화 시장 노동자로 살았던 1960년대 후반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위한 주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얻어 한일 현정을 체결하였다. 한일 협정 체결 이후 도입된 일본의 차관 (무상공여 2억 달러, 유상차관 3억 달러)으로 수많은 기업이 설립되면서 이 당시의 공업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본과 기술, 기계설비, 원료, 시장 등 모든 것을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는 대외 의존적 공업화였다.


이 시기에는 구 지배계층인 지주층이 몰락한 자리에 자본가 계급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빠른 속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에 가속도를 붙이기 위해 대자본이든 중소/영세 자본이든 가리지 않고 자본가들을 철저하게 비호했고, 반공 이데올로기와 무단적 노동 탄압을 통해 가혹한 초과 착취를 보장했다. 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근로기준법도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공업화의 진전에 따라 공장 노동자들의 수도 급증하였다.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 시장 부근도 1968년 20월에는 연건평 1,500평의 통일 상가가, 1969년 8월에는 연건평 5,000평의 돈화 시장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노동자의 수가 2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강력하게 밀어붙였었던 저곡가 정책과 연관이 깊다. 저곡가 정책으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던 농촌이 이농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1960~1975년 사이에만 무려 700만의 농민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밀려들게 된다. 이러한 이농민들은 도시에서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고,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의 발달에 원동력이 되었다.



평화 시장의 노동 환경




60년대의 공업화 전략은 섬유였고, 그 중에서도 의류산업의 중요도는 더욱 컸다. 의류산업의 번영을 통해 광범위한 중소, 영세 자본가들이 만들어졌으며, 대기업의 대부분도 의류산업의 수출을 통해 돈을 벌었다. 이러한 의류산업의 중심에는 바로 평화시장이 있었다. 당시 평화 시장은 근처의 통일 상가와 동화시장과 함께 전국 기성복의 70%를 공급하는 의류산업의 메카로 기능했다. 하지만 평화 시장 일대의 이러한 번영이나 업주들의 치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거기에서 일하는 ‘산업 역군’, 즉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은 실로 참혹했다.


먼저 피복 공장 내에서의 직종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장 내의 노동자들은 공장장 다음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재단사를 중심으로 해서 미싱사, 미싱 보조, 재단 보조, 시다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평화 시장을 예로 해서 그 비율을 나누어 보면 노동자 1만 명 당 재단사가 3백 명, 재단 보조가 4백 명, 미싱사와 미싱 보조가 4천 명, 시다가 4천 명, 그리고 업주와 그 외 잡다한 직종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중 미싱사와 미싱 보조, 시다는 대부분이 어린 여공들이었고 이들이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의 약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일하는 평화 시장의 노동조건은 어떠하였을까.




<시다, 미싱사 및 동료들과 함께 있는 전태일 열사>




첫 번째로 노동시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 정도였다.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야간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잦으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한 달을 통틀어 휴일은 이틀. 제 1주일과 제 3주일의 일요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것이나마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요컨대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노동 시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장시간의 중노동을 해내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도대체 얼마인지 알아보자. 우선 노임 지불 제도를 보면 미싱사, 미싱 보조, 견습공의 경우 대부분이 작업량에 따라 지급되는 도급제이다. 이러한 도급제는 작업량에 따라 수입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생활고에 쫓기는 노동자들은 불가피하게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어진다. 게다가 시작 전에 1매 당 얼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고 일이 끝난 후에 업주가 일방적으로 주기 때문에 작업량에 비해 정당한 월급을 받을 수도 없게 된다. 즉 이 도급제는 업주에게는 유리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되는 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수준 또한 지극히 낮은 저임금이었다. 시다의 경우 월급이 월 1800원에서 3000원이었는데 이는 하루 14시간의 중노동을 하고도 받는 일당이 커피 한 잔 값을 약간 넘는 정도의 70원이었던 것으로, 노동자들은 노동에 비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다음으로 작업환경을 들 수 있는데, 작업장의 경우 업주들은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락방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한 층을 인위적으로 두 층으로 나누어 공간을 늘린 것으로 이렇게 천장이 낮아진 공간에서 직공들은 허리를 펴지도 못할 정도였다. 또한 의류 산업의 특성 상 작업 시 옷감에서 실밥이나 먼지가 많이 발생하게 되는데, 업주들은 환기 시설도 만들어놓지 않고 좁은 공간에 최대한의 인원을 집어넣음으로써 노동자들은 각종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시다공들>




마지막으로 작업장내의 조명상태도 문제였다. 거의 햇빛이 들지 않는데도 조명시설은 극히 빈약하여 작업장 내부는 대낮에도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데,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바로 눈앞에는 하루 종일 백열전등이 켜져 있었다. 이러한 직접조명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눈은 항상 충혈 된 상태였으며, 밝은 햇살 아래로 나오면 눈을 뜰 수가 없는 등 각종 눈병을 앓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불량한 작업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건강상태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태일이 1970년도에 설문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라고 하였고 미싱사의 90%가 신경통,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 등의 환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환자이며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머티즘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곱이 끼는 안질에 걸려있는 사람은 설문에 응한 126명 중 전원이었다.




전태일의 노동 운동의 진행 과정




전태일이 노동 운동을 하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그가 앞서 언급한 평화 시장에서의 노동환경과 노동구조에 대한 모순을 발견한 것이 일차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제도도 시행되고 있지 않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조차 돌아오지 않았던 모순적 상황에서 전태일의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 자신의 생존권을 위한 불가피한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들이 어린 시다공들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것을 오랜 재단사 생활을 통해 계속 봐온 그는 근로기준법에서 제시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의 이런 노동운동에의 첫발자국이 바로 ‘바보회’의 창립이다.


‘바보회’란 젊은 노동자들의 최초의 조직으로, 1968년 경 전태일의 제의로 만들어진 재단사들의 모임으로 근로조건의 개선에 그 목적이 있는 모임이었다. 전태일은 자신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바보같이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 살아왔으며, 또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실현되지 않을 바보같은 일이라 하며 막으니, 그럼 차라리 바보같이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는 주장하며 모임의 이름은 ‘바보회’라고 지었다. ‘바보회’는 전태일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노동현황 설문지를 돌리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회원들의 소극적인 참여와 자금의 부족 등으로 인해 모임은 곧 사실상 해체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 ‘바보회’에서 돌렸던 노동현황 설문지를 갖고 시청 근로 감독관을 찾아간 전태일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나라에서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근로기준법을 제정한 줄로 생각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 모든 희망을 걸다시피 했던 전태일로서는 그것을 준수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는 근로감독관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개 노동자였던 그는 노동청이 기업주와 결탁하여 서로 돕고 봐주는 공생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듣고도 최소한의 관심 표시조차 없자 큰 충격에 빠지고, 그가 싸워야 할 상대가 단순히 기업주들뿐만이 아니라 전체적 사회의 구조와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1970년에 전태일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들게 된다. 이는 그동안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좀 더 구체적이고 저항적인 투쟁을 목표로 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보회’는 진정이나 호소를 했던 진정단체였던 반면 ‘삼동친목회’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투쟁조직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삼동친목회는 바보회 때 만들어 놓고 미처 다 돌리지 못한 설문지를 돌리고 이를 회수해서, 그들이 따로 조사한 여타 여러 가지 작업환경들의 실상 보고서와 함께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 신문사에서는 사회면 톱기사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를 다루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으로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관심의 환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용기를 얻은 전태일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평화시장 측에 노동환경의 개선과 근무시간의 축소, 월급의 인상을 직접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이들을 회유하는 척 하며 끝까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는 노동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참상으로 인해 추궁을 당할까봐 우려를 하던 노동청은 처음에는 곧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처럼 하며 그들을 회유했으나 곧 태도를 바꾸고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전태일은 말로서는 더 이상 해결이 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데모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당시가 선거철인 것을 감안해 그 때가 적기라 생각하고 삼동친목회회원들을 설득하여 10/20 데모를 계획한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의 시정 약속으로 이를 보류하고 있다가 그가 국정감사가 끝나자마자 또 이를 모른 체하자 그들은 10/24에 다시 데모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장 내에 잠입해 있던 형사들이 이를 미리 알고 진압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


마침내 노동자들은 격분하게 되고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이번에야말로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것임을 결심하게 된다. 전태일은 이전까지의 데모의 실패가 단지 정부의 탄압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데모가 실패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노동자들이 투쟁자세가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했다. 경비원과 형사들 수십 명이 곤봉으로 막는다고 한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확고한 자세로 나왔다면 그들이 노동자들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인데, 노동자 당사자들이 흔들리고 우물쭈물함으로써 결국 데모가 탄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림으로써 노동자들의 위축과 좌절을 떨쳐버리게 하고, 또 사회의 착취와 무관심과 억압의 질서를 깨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1월 13일, 그는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길에 던지고 만다. 그는 화염에 휩싸이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의 구호를 외치며 쓰러졌다. 그리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구급차로 응급실에 실려 간 뒤 결국 숨지고 만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자살 장면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출처>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이 갖는 의미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노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의 결사적 데모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사람들은 노동자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생들은 연속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 수호를 비롯한 민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고 신문, 방송 등의 언론기관들도 노동문제에 대한 보도기사 등을 발표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들은 학생들과 종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이는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 비판세력으로 연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의 투쟁은 현실의 질곡 아래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었던 모든 민중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어 빈사상태에 있던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항의가 종례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한국노총 아래서의 무기력한 어용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이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단지 그 개인의 자살로 끝난 것이 아닌, 당시 한국의 강압적 정권 하에서의 노동 운동에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듯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70년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두가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한국 노동운동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한국의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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