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터키·중국·미얀마 트랙터 일주,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
“2005년 11월, 1차 트랙터 협찬 시도: 트랙터 1위 회사 ‘대동공업’ 방문, 협찬 실패!”
“2005년 11월, 2차 트랙터 협찬 시도: 국회의사당으로 지역구 국회의원 방문, 협찬 실패!”
“2005년 11월, 3차 트랙터 협찬 시도: 노홍철 깃발 협찬, 의형제 맺기 프로젝트 실패!”
“2008년 3월, 4차 트랙터 협찬 시도: 국제농기계 트랙터 회사 방문하기 실패!”
“2008년 8월, 5차 트랙터 협찬 시도: 동양트랙터 회사 방문하기!”
마지막 협찬 프레젠테이션 시도: 동양트랙터 본사 프레젠테이션(2008년 8월)
떨렸다. 동양트랙터 본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역시 모든 일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 당시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다. 청중을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프레젠테이션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굴까?’
이 본질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교수? 전문가? 친구? 아니었다. 바로 ‘스티브 잡스’였다. 그의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하나 하나 분석해보기로 했다. 바로 서점에 들러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책을 사서 그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디자인도 참고했다. 아니, 똑같이 모방을 했다고나 할까. 스티브 잡스가 검정색 배경 한 가운데에 흰색 ‘아이팟’을 놓았다면 빨간색 ‘트랙터’를 가져다 놓았다. 아이팟에 저장할 수 있는 노래 수를 표기해놓았다면 트랙터가 국내 일주 시에 주행할 수 있는 킬로미터 거리를 표기해놓았다. 아이팟 모양이 들어간 자리는 빠짐없이 트랙터로 바꿨다.
당당하게 들어선 세미나실. 이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각 부서의 과장급 인사 여덟 명이 세미나실로 들어섰다. 이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차례였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프레젠테이션 대본 스크립트도 없었다. 단 한 번도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또다시 나의 친구 ‘스티브 잡스’를 따라했다. 그가 해외 언론에 아이팟을 소개할 당시 사용했던 스크립트가 책 마지막 뒷부분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밤새 외우고 익힌 잡스식 발표문과 몸짓으로 말했다.
“오늘, 여러분에게 원대한 세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 첫 번째, 아이팟의 소개입니다. (중략) 두번째 아이팟의 기능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원대한 세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 첫 번째, 트랙터 여행의 소개입니다. (중략) 두 번째 트랙터 여행의 일정입니다….”
나는 스티브 잡스의 대본대로 수십 번 연습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곧바로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대답의 허점을 찾기 위해 트랙터 회사 직원들은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트랙터 여행을 준비하며 보냈다. 내가 준비한 것만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기태씨, 만약 트랙터가 주행 중 고장이 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트랙터가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고칠 수 있는 수리기술을 구비해 트랙터 여행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깨어야만 날카로운 질문들에 응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오히려 트랙터가 고장이 난다면 좋은 것 아닙니까?”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민이 논밭을 갈거나 도로를 주행할 때 반드시 한 번은 고장이 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트랙터 국내 여행 중에 한 번은 고장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트랙터 국내 여행 도중에 고장이 났을 경우, 어디든지 언제든지 1시간 이내에 달려와서 고쳐줄 수 있다는 A/S 체계를 홍보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아닙니까? 동양물산 트랙터 A/S 체계가 좋지 않습니까? 동양물산 트랙터가 고장이 잘 납니까? 저는 동양물산의 기술력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유 있게 그리고 패기 넘치는 태도로 일관하며 질문에 하나하나 응대해 나가자 한 사람, 한 사람씩 나의 제안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모두들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흘 후, 저는 다른 회사와 프레젠테이션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 약속을 지켜도 되겠습니까?”
그 질문을 던진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2주 후에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최대한 빠른 시일 내 확답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질문을 통해서 동양물산뿐만 아니라 다른 트랙터 제조업체에도 같은 제안을 했고 내 제안을 놓친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 의도가 적중했는지, 2주 후에 나온다던 검토 결과가 이틀 만에 나왔다.
“축하 드립니다. 오랜 시간 이루지 못한 꿈을 드디어 이루게 되었군요. 저희 동양물산이 트랙터 한 대와 유류비 300만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08년 9월 1일. 동양물산 본사에서 ‘국내 최초, 트랙터 전국 일주 협찬 조인식’이 열렸다. TV 뉴스에서나 봤던 기업과 개인 간의 계약 장면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트랙터를 타고전국을 일주하는 모습을!
국내최초의 트랙터 전국일주 출발: 경남 하동 출정식(2008년 9월)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국내 최초의 트랙터 전국일주의 출정식을 어디에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본질에 다가갔다.
‘트랙터는 도시에 있어야 할까? 농촌에 있어야 할까?’
맞다. 농촌에 있어야 한다. ‘강기태’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해 보니 바로 내 고향 ‘경남 하동’이었다. 곧바로 협찬 조인식 서류와 여행계획서를 들고 하동군청으로 향했다. 군청 2층 군수실 앞. 비서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네. 하동군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사전에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하동군민이 하동군수를 만나러 오는데 꼭 사전에 약속을 해야만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전에 약속하지 않은 하동군민은 앞으로 하동군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군수실 문이 열렸다. 하동군수에게 트랙터 출정식을 군청 광장에서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군수는 “왜 꼭, 굳이 군청 광장에서 해야 되느냐”며 되물었다. 준비해갔던 대답을 자신 있게 늘어놓았다.
“첫째는요, 가뜩이나 지방 자치단체는 홍보가 절실히 필요한 법인데요. 이번에 출정식을 한다면 적어도 경남에 있는 KBS, MBC, KNN, 농민신문, 경남신문 등은 오지 않겠습니까. 하동군 홍보에 자그마한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한데요?”
“둘째는요, 하동 특산물인 녹차와 매실을 주십시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에게 맛을 보여주고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습니다.”
“셋째는요, 하동 로고가 박힌 티셔츠와 모자를 주십시오. 하동 로고와 이미지를 전국에 알리고 싶습니다.”
하동군수를 만난 지 10여 분만에 여행에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했다. 농산물과 티셔츠 등을 ‘억수로’ 많이 받았다. 그리고는 며칠 뒤, 2008년 9월 18일, 그토록 염원했던 ‘국내최초의 트랙터 전국 일주 출정식’이 하동군청에서 열렸다.
2005년 11월, 대학교 4학년 때 시작된 ‘트랙터 프로젝트’는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크게 5번에 걸친 실패와 좌절, 약 90통이 넘는 편지에 대한 무답장, 때로는 문전박대, 사기꾼, 꿈만 쫓는 청년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나름의 순수성도 있었고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여행에 대한 갈망과 염원이 있었다. 다시 돌이켜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시도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길 위에서 만났던 수많은 분들이 건네주신 물 한 모금, 과일 한 조각으로 인해서 그 여행 길과 험난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 글을 읽게 될, 그 전에 읽었던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노라고, 앞으로는 매 순간 순간마다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 좋지 않을까, 감히 말씀드려 본다. 삶은 그렇게 거창한 것보다 주위 근처의 소소하고 작은 것에 우리네가 찾는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행운의 답을 여러분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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