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과일장사
애견왕등록일2009.09.10 18:08:03
조회2,647
햇배가 나왔으니 가져다 팔아보라는 시장상인의 말에 낼름 배 두 상자를 차에 싣고보니 수박, 포도, 바나나... 팔아야할 품목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서울에서 간신히 고등학교만 나온 나를 반겨주는 사업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못 배운 사람은 자기장사가 빠르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시작한 과일장사다.
낡은 트럭으로 서울시내 변두리 주변을 다니며 장사를 한지도 어느덧 9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한 군데서만 붙박이로 장사를 하면 금세 매출이 줄어들므로 나는 서너 군데 자리를 정해놓고 이틀마다 옮겨가는 방식으로 장사를 한다.
오늘은 신림동에서의 그 두 번째 장삿날이다.
차를 세우고 호로를 걷어 물건을 진열한다.
포도가 10상자, 수박이 35통...
포도는 송이송이 꺼내어 일일이 저울에 달아 3근 단위로 진열을 한다.
이곳 신림동에서는 박스로 구입하기보단 소단위를 찾는 소비자가 많은 이유에서다.
배는 가만... 하나, 둘, 셋... 스물 이거 한 개에 2000원은 받아야겠는걸!
배를 마지막으로 모든 물건의 진열이 끝이 났다.
보통은 물건을 진열하면서 개시를 하기마련인데 휴가철이라 그런지 통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담배 한가치를 피워 물었다.
"이야, 배가 벌써 나왔네! 그놈 참 실허다. 거 하나에 얼마씩 이유?"
"예 할머니 이거 하나씩은 안 팔아요!"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의 행색으로 보아 절대로 이 배를 살 소비자가 아니다.
나는 애초부터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아버린다.
천박한 장사치라 했던가! 노점 장사 몇 개월 만에 나는 그 사람의 행색만 보고도 물건을 살 사람인지 사지 않을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장사치에겐 노인이고 아이고 간에 그저 물건을 살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손님인 것이다.
아마도 그 노인이 물건을 살 것처럼 보였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이구, 할머니! 배가 아주 꿀입니다요. 꿀! 맛 좋습니다.
점심때가 다 되도록 고작 삼 만원의 매출뿐이다. 앞으로 서너 시간은 불덩이 같은 저 태양 덕에 장사는커녕 사람구경하기도 힘이 들 것이다.
나는 시동을 걸고 차에 들어가 에어컨을 켠 채 라디오를 듣는다.
똑똑\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
오전에 그 할머니이다.
"저기 몇 시까지 여기 계슈?"
"저녁까지 있어요."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저녁8시
오늘은 그래도 오후 매출이 제법 괜찮았다.
수박은 35통이 모두 나갔고, 포도도 2상자만이 남았다.
그런데 배는 고작 반 상자나 나갔을까...
여하튼 들어온 돈을 헤아려보니 총 35만원의 매출 이다.
근래의 장사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다.
보통 마진이 30% 정도니 이것저것 재하더라도 하루 일당으로 10만 원 정도는 챙긴 셈이다.
손님은 수박을 찾는데 더 이상 수박은 없고 해서 일찍 들어갈 요량으로 나는 정리를 서둘렀다.
대충 물건들을 차위로 주워 올린 후 어질러진 바닥을 청소하고 있는데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에 그 할머니였다.
노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휴... 아직 안 들어갔네! 그 배 좀 주슈!"
"예! 몇 개나...?"
"아까 보니 5개씩 담아 팔던데... 여기 만원 가져왔어!"
노인은 구 지폐가 섞인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9장과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내밀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총각이 꼭 우리 아들 같아서 내 팔아주려고 이리 왔어!"
"하하, 아드님이 저를 닮았어요?"
"...응. 아주 많이..."
노인은 그 쭈그러든 가는 팔로 무거운 배 다섯 개가 든 비닐봉지를 거머쥐고는 지팡이를 짚고 겨우 일어선다.
"할머니 댁이 어디세요? 저도 들어가려 하는데 댁까지 태워 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노인을 옆에 태우고 골목골목 지나 노인의 집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반지하의 허름한 노인의 집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사시나! 아들이 있다더니...
이윽고, 노인이 방문을 열자 조그마한 상위에 단출한 음식들과 향불이 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청년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사실 오늘이 우리 아들놈 제삿날이여! 배를 아주 좋아라 했구먼..."